초반에 VC생활을 시작했을 때 정말 너무 재밌었어요.
많은 대표님들을 만나뵙고 진지하게 그들의 고민과 사업 방향성에 대해서 듣는 것은 정말 "특권"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지금도 마찬가지로 이런 이야기를 바로 앞에서 들을 수 있다는 것은 VC라는 직업의 최고 장점이라고 생각해요.
다만 변한게 있다면 들어도 너무 많이 들어버려서 이제는 일종의 편견이 생겨버렸다는 점 정도가 있겠어요.
무슨 이야기냐면 대부분의 창업자분들과의 대화에서 느껴지는 일종의 패턴이 있거든요. 이런 패턴을 좀 알고 나니까 IR자료만 몇 번 넘겨봐도 대충 어떤 식으로 이야기가 전개될 지 감이 온다는 거죠. 그래서 예전만큼의 신선함이나 기대감이 없어졌어요.
그리고 세상에서 진짜로 "새로운 것"은 없다고 느끼게 돼요. 왜냐면 어차피 누군가가 하고 있는걸 조금씩 변화시키거나 보완시키면서 살아가는게 우리네 삶이기 때문이예요. 그 누구도 살아보지 못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은 정말 전체 인구 중 0.0001%도 안 될거라고 생각해요. 일론 머스크 정도...?
좌우지간 오늘 이야기 해 드릴 회사는 제가 VC초기에 만나뵈었어요.
말씀드린 바와 같이 매우 설레는 하루하루를 보내는 나날들이었죠. 그 와중에 유난히 친하게 지내게 된 VC동생이 한 명 있었어요. 이 친구는 업계에서도 이미 활발하게 투자하는 것으로 정평이 나 있었고 대화해보면 정말 그 식견과 상식에 감탄하게 되는 그런 친구였죠.
어느 날 이 친구가 Deal을 하나 같이 해보자는 거예요. 나는 물론 언제나 검토는 콜이었기 때문에 어서 티타임을 잡고 그 친구와 만났어요. 그 친구의 얘기를 들어보니까 회사는 일단 "제조업"이었어요.
제조업....
솔직히 VC 초기이긴 했는데 제조업이 투자하기 아주 어려운 분야라는 것은 귀에 못이 박히게 들어서 알고 있었거든요. 일단 기술개발이나 하드웨어 개발을 위한 비용과 시간이 만만치 않게 들어가고, 일단 개발이 완료 된 후에는 공정을 바꾸거나 방향을 트는게 거의 불가능해서 매출이 한 번 안나오기 시작하면 끝도 없이 안나오는 아주 어려운 분야예요.
이런 점을 알고 있는 제 표정이 조금 안좋아지자 그 눈치빠른 친구는 잽싸게 회사의 좋은 점을 설명하기 시작했어요. 일단 회사는 몇 백년을 이어 온 기존의 제조 방식을 새로운 방식으로 바꾸는 기계를 만드는 회사였고 해당되는 산업 자체는 매우 급성장 중인 추세였기 때문에 그런 점은 상당히 매력적이었어요. 그리고 매출도 일부 나오고 있었던 상황이다 보니 소위 "가능성"만 보고 배팅하는 상황은 아니었어요.
특히나 아직까지 이 회사가 속한 산업이 중국에서 개화되지 않은 산업 중 하나여서, 곧 개화될 시 엄청난 물량이 필요할 것이라는 합리적인 추론이 가능한 상황이었죠. 이 친구로부터 회사에 대한 설명을 2시간 정도 듣고 나니까(세뇌 당하고 나니까) 저도 모르게 굉장한 기회라고 생각하게 되었어요.
이 친구와의 만남을 가진 날로부터 정확히 이틀 후에 제가 회사로 방문을 했던 것으로 기억해요. 매우 급하게 첫 미팅을 가진 셈이었던 것이죠?
대표이사의 첫 인상은 "정말 스마트 하고 샤프하다"였어요.
국내 유수의 대학을 졸업하고 별 다른 사회생활 경험 없이 이 아이템으로 창업을 하였는데, 사실상 이 아이템 관련한 경력이 전무했음에도 불구하고 0부터 여기까지 해왔다는 거예요.
그리고 이번 라운드는 B라운드에 해당되기 때문에 이미 기존에 A라운드 때 국내 유수의 VC들이 상당수 투자를 해 둔 상태여서, 그 자금을 바탕으로 가내수공업에 가깝던 공정도 현재의 "그럴싸한" 공장 같은 퀄리티로 바꿀 수 있었다고 해요.
금번 투자금은 중국 및 해외 진출을 위한 사무실 개소와 인력 충원, 그리고 마케팅 등으로 지출할 것이라고 하여서 납득이 가는 상황이었죠. 전반적으로 매우 스마트한 설명이어서 저는 점점 확신을 가지게 되었어요. 심지어 이번 라운드에서도 저와 그 동생을 포함해 다수의 VC들이 자금을 집행하기로 한 상황이어서 더 믿음이 갔었죠.
일단 회사로 돌아와서 IR일정을 잡고 투자검토를 본격적으로 시작했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