급하게 만나 뵌 대표님은 50대 중반의 장난기 가득한 표정을 가진 분이었어요. 이 회사를 창업하기 전에도 유관 회사에서 꽤 오랜 기간 근무를 하셨어서 많은 네트워크와 산업 인사이트를 가지고 계셨었죠.
특히나 좋은 IP를 잘 소싱하는 네트워크가 뛰어나셨는데 성공 사례들을 들어보니 아주 좋은 레퍼런스가 될 것 같았어요. 그리고 해외 유수 업체들의 한국 단독 유통사로 자리를 잡고 있는 것도 매우 좋아 보였죠. 그리고 무엇보다도 다른 VC들로부터 이미 투자를 좀 받아둔 상태였어요. VC들이 이렇게 조용히 투자를 해 둔 것을 보니 뭔가 숨겨진 내공 같은게 있나 싶었죠.
그 때는 제가 투자를 시작한 지 2년 반 정도 지난 시점이어서 이리저리 레퍼런스 체크가 조금은 가능한 상황이었고 산업에 대한 분위기도 전반적으로 숙지하고 있는 상태여서 사리분별 정도는 가능한 상황이었어요.
회사에 방문한 다음날 바로 내부적으로 투자심의를 진행하기로 합의했어요.
시간이 너무 없어서 IR은 생략하기로 했어요. 이게 정말 이례적이었던게 대부분의 투자건은 반드시 IR을 거치게 되어 있어요. 이를 통해서 내부 심사역들도 이 업체에 대한 의견들을 주거니 받거니 하게 되니까 당연하게도 이 과정을 패스하는게 불가능할 정도로 의무화 되어 있었죠.
그런데 이 상황에서는 매우 이례적으로 IR을 생략했던 거예요. 심지어 주니어심사역이 올린 딜이었는데도 이렇게 하기로 한 걸 보면 저희 회사가 당시 얼마나 급했었는지 알 수 있어요.
대부분의 투자건은 IR 이후 짧아도 2달, 길면 6~7개월 이후에나 투자금 납입이 마무리 되곤 하거든요. 근데 저희는 2주 안에 끝내야 하는 절박한 상황이어서 이런 이례적인 프로세스가 가능했던 거예요.
그 바쁜 와중에 저는 또 CB(전환사채)로 투자하기로 합의를 했었어요. 이전 투자자들이 CB로 들어와 있는 것도 이유 중 하나였지만 일단 회사 입장에서는 CB가 그다지 좋은 투자금 조달 방법은 아니예요. 제가 생각하는 회사 입장에서 유리한 투자금 조달 방법의 순서는 이래요.
보통주 → CPS(전환우선주) → RCPS(상환전환우선주) → CB(전환사채) → EB(교환사채) or BW(신주인수권부사채)
보통주를 제외한 CPS, RCPS, CB, EB, BW 등은 "종류주식"이라고 칭하는데 이런 종류주식들은 일정부분 회사에 상환이나 전환에 관한 "의무"를 지울 수 있어요.
이러한 투자금 조달 방법에 대한 사항은 다음번에 한번 자세하게 다뤄볼께요.
좌우지간 이번 회사에는 CB(전환사채)로 투자하게 되었는데, 전환사채를 정말 간단하게 설명하면 이런 조건들이 붙는 거예요.
1. 투자한 금원 20억원을 일종의 "빌려주는"것이예요. 그래서 "사채"라고 해요.
2. 따라서 만기가 있고, 만기 때 원금과 약속한 이자를 갚으면 되요.
3. 그런데 만기 전에 회사가 굉장히 좋아질 것 같으면 "주식"으로 전환할 수 있어요. 이 경우에는 사채를 가진 자로써의 권리는 모두 사라지고 주식을 보유한 주주의 권리만 보유하게 바뀌게 되요.
CB가 좋은 투자방법인 이유는, 회사가 생각만큼 성장하지 못할 때는 만기 때 원금과 이자를 돌려받을 수 있고, 잘 될 경우에는 주식으로 전환해서 IPO 후 매각이 가능하기 때문이예요. 투자자 입장에서는 CB 정도면 굉장히 좋은 조건으로 투자를 하는 셈인데, 일반적으로 회사 입장에서는 보통주나 CPS, RCPS로 자금을 조달하고 싶어해요.
가장 결정적인 차이는 보통주는 투자자가 회사에 자금을 돌려달라고 할 수 가 없어요. RCPS는 만기 시점에 자금을 돌려달라고 할 수 있는데 특수한 상황에서만 가능해요. 회사가 이익을 계속 잘 내서 쌓이게 되는 "이익잉여금" 한도 내에서만 돈을 돌려달라고 할 수 있어요. CB는 이런거 상관없이 그냥 만기에 돈을 내놓으라고 할 수 있지만 RCPS는 "이익잉여금" 한도 내에서만 갚으라고 해야 하니까 CB보다는 불리한거죠.
CPS는 돈을 돌려달라고 하는 권리가 빠져있고 대신 보유한 우선주를 보통주로 바꿀 수 있는 권리만 있어요. 사실상 우선주라는 걸 제외하면 크게 메리트가 없는 종류주식이죠.
좌우지간 제가 이야기를 잘 했는지, 피투자회사 대표님이 저에게 감화감동 되신 것인지 20억원을 CB로 투자할 수 있게 되었어요. 예비투심을 진행하고 리스크심의는 기존 투자자들이 작성한 보고서로 대체했고, 본투심 후 납입까지 정말 딱 2주 만에 끝냈어요. |